이야기로 읽는 묵상
맹인이었던 사람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다시 불려 나옵니다. 그 자리는 대화의 자리가 아니라 이미 결론이 정해진 심문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안다.” 그들은 사실을 묻는 척하지만 자기 확신을 강요합니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어딘가로 불려 나옵니다. 회의 자리로, 면접 자리로, 보고 자리로, 발표 자리로.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미 정해진 분위기, 암묵적인 기대, 눈치와 압력이 흐릅니다. “이 정도는 맞춰야지.” “괜히 튀지 마.” “분위기 깨지 말자.” 화요일 출근길, 학교 개학 첫날, 대학원 첫 수업, 새 프로젝트의 시작.
우리는 또 한 번 세상 앞에 불려 나옵니다.
그 자리에서 맹인이었던 사람은 복잡한 논리를 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본다.” 그는 경험을 말합니다.
자기가 아는 진실을 말합니다.
그 대가로 그는 쫓겨납니다. 그러나 그는 잃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방향을 정한 사람입니다.
신앙은 안전한 환경이 아니라 불려 나오는 자리에서 드러난다.
제자의 길은 분위기를 맞추는 삶이 아니라 진실을 붙드는 삶이다.
화요일의 회의실과 강의실이 바로 제자의 자리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분위기에 맞추며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 편에 서서 말할 것인가? 우리는 매일 불려 나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자리로 보내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묵상과 성찰 3가지
나는 오늘도 ‘질문’이 아니라 ‘기준’ 앞에 불려 나갑니다.
요한복음 9장의 심문은 사실 확인이 아니라 틀에 맞추라는 요구했습니다. 사람을 묻는 게 아니라 “너는 우리 편이냐”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종종 진실보다, 관계보다, 하나님보다 먼저 옵니다.
나는 화요일의 어떤 자리에서 ‘이미 정해진 답’에 맞추느라 진실을 깎고 있는가?
나는 지금 진실을 잃지 않으려고 침묵하는가, 손해를 피하려고 침묵하는가?
두려움은 죄를 짓게 하기보다, ‘내 고백을 작게’ 만듭니다.
신앙은 ‘나쁜 사람 vs 좋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잃는 게 더 무서운가의 문제로 드러납니다. 나는 무엇을 잃는 게 두려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