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복음이면 충분합니다.(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7절펼치기

13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개역개정

2025년 9월 14일 주일예배

설교: 이지열 담임목사

서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두 가지 깊은 흔들림을 경험합니다. 첫째는 내 자신에게 실망하는 순간입니다. 기도해도 무너지는 나를 봅니다. 다짐했는데 다시 반복되는 죄를 봅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는 낙심이 우리를 흔듭니다.

그러나 더 깊은 흔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붙잡고 믿었던 확신이 흔들릴 때입니다.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믿었는데, 직장에서 나의 성실함이 무시될 때, 확신은 흔들립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곳이야.” 믿었는데, 상처와 오해가 쌓일 때, 그 믿음은 무너집니다. “말씀대로 살면 결국 잘될 거야.” 확신 했는데, 현실의 장벽 앞에서 그 말씀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내가 붙잡던 확신이 흔들릴 때,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진리마저 부질없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믿어온 모든 가치는 흔들리는 모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그 틈을 파고드는 건 언제나 사람의 말과 세상의 문화의 소리입니다.

직장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고, 노력한 만큼 인정받지 못할 때, 마음속에 이런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네가 믿음 지키는게  무슨 소용이야? 세상은 실적이 전부구나!” 그동안 붙들었던 신앙의 소신이, 어느 순간 아무 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관계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공동체를 기대했는데, 가까운 신앙의 친구와 갈등이 깊어지거나, 교회 안에서 상처를 경험할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건 결국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내가 믿어왔던 건 그냥 이상에 불과한 것이었어. 그렇게 가치 있게 여기던 복음의 진리조차 부질없게 여겨집니다.

신앙생활 속에서도 비슷합니다. 오랫동안 지켜온 원칙이 있습니다. 주일 성수, 정직한 삶, 순결, 사랑, 전도, 십일조…. 그런데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직하면 손해야. 네 감정을 따라 살아야 해. 성공이 먼저지, 믿음은 나중이야.” 결국 세상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복음의 소리가 점점 작아집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순간을 경험합니다. 내가 붙들었던 확신이 흔들리고, 그 자리를 세상의 말과 문화의 목소리가 차지할 때, 마음은 더 크게 흔들립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우리는 깊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정말 이 길이 맞는 것일까? 내가 믿고 있는 복음이 진짜 능력이 되는가?”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조롱 앞에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거짓 소문이 돌자, 그동안 굳게 믿었던 복음의 소망조차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결국 사람의 말이 더 크게 들리고, 복음의 소리는 점점 잊혀져 갔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흔들고,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에는 세상의 문화의 소리가 언제나 더 크게 들렸습니다.

그들이 그러했던 것 처럼,오늘 우리도 불안과 비교와 상처 속에서 똑같이 복음의 소리가 작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흔들리는 이유는 같습니다.

본 론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대답을 주고 있을까요? 15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여기서 말하는 “전통”은 단순히 어떤 문화나 습관이 아닙니다. 전통이란, 변하지 않고 이어져 온 복음 자체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논리나 더 화려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미 들은 복음, 처음부터 붙들어온 은혜를 다시 기억하게 했습니다.

왜 바울은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처음부터 붙들어온 복음을 다시 강조하고 있을까요? 사람은 늘 새로운 논리, 신선한 대안, 화려한 해석을 원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늘 이런 갈망이 있습니다.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이 없을까?” “지금 상황에 맞는 새로운 대답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욕구는 결국 마음안에 있는 불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두려움이죠.

신앙생활 마져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복음, 십자가, 은혜… 다 압니다. 그런데 그걸로 지금 내 문제에 답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문득문득 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 속에는 우리 마음의 ‘불안’이 드러나 있습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복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지금 붙든 것이 충분할까?”라는 불안을 갖습니다.

직장에서 승진을 해도, “더 올라가야 안전하다”는 불안이 생깁니다. 건강이 좋아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따라옵니다. 관계가 좋아도 , “이 사랑이 오래 갈까?”라는 걱정이 늘 있습니다. 이 불안은 결국 창조주를 떠난 인간의 근원적 불안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인간의 영혼은 “더 필요하다”는 목마름을 느끼는 것이죠.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구원의 은총이 주어졌는데, 당장 월급통장은 그대로이고, 내일의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더 눈에 보이는 성과와 감정을 찾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 세상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지금이대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지금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복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고, 다른 대안을 찾으려 합니다.

성경은 이미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했습니다. 먼저, 더 ‘현실적인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요구했습니다. 아론이 만든것은 금으로 만든 황소였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그당시 애굽에 살면서 가장 그들에게 안전감과 즉각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아피스황소를 대체해서 만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고 만질 수 있는 신을 원했습니다. 인간은 늘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안정감을 선호합니다. 금송아지는 “그들의 삶을 안전하게 해 줄 보증 수표” 같은 것이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황금은 즉각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아론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이는 금송아지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가장 약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안정감, 즉각적인 만족, 익숙함에 취약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멀게 느껴질 때, 우리도 이렇게 보이는 대체물을 붙들고 싶어집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또 다른 예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지겨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를 달라!”며 불평했습니다. 그들의 요구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탐욕에 사로잡혀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급이 때로 단조롭고 작게 보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인간의 마음을 폭로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더 현실적인 것, 더 새로운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강력한 능력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새로운 논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굳건히 서서, 이미 받은 전통, 곧 복음을 지키라.” 왜일까요? 바울은 알았습니다. 문제는 복음의 부족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충분히 붙들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병을 고치는 약이 이미 있는데, 내가 꾸준히 먹지 않으니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약이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그 약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민간요법을 찾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목을 충분히 축일 수 있는 맑은 물이 있는데,  내가 자꾸 갈증이 더 빨리 풀릴 것 같은 ‘탄산음료’만 찾는 것과 같습니다. 순간은 시원해 보이지만, 금방 더 목마르게 만들 뿐입니다.  물은 언제나 충분합니다. 내가 자꾸 다른 걸 찾는 게 문제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은 세상의 계산기에 더 기댈 때, 마치 튼튼한 의자는 옆에 두고 불안정한 의자에 앉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알고 있지만, 실제 선택은 사람의 말과 문화의 기준에 끌려갈 때, 마치 길을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을 켜 두고도,  옆사람의 불확실한 손가락질을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흔들릴 때, 새로운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시 들려 올까요? 바울은 복음의 내용이 담겨있는 기록된 말씀으로 돌아가라고 말해줍니다.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받은 전통” 그것은 바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세상의 소리가 아닌 복음의 소리를 듣게 합니다.

이것을 증명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배고프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배고픔, 갈증, 피로와 같은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자기보호 본능이 가장 먼저 올라옵니다.

“지금 당장 채워야만 산다”라는 생존 신호가 뇌와 몸을 흔듭니다. 평소에는 이성적으로 절제할 수 있는 부분도, 기본 욕구가 결핍되면 무너집니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으로, 때로는 분노와 조급함으로 표출됩니다.

사단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떡이 되게 하라” 예수님도 그 유혹을 이겨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의 ’기록된 말씀’으로 상황을 재해석하셨습니다.

말씀은 상황에 대한 해석의 프레임을 바꿔 줍니다. 말씀은 내 기분에 속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기록된 말씀이 내 감정을 다스릴 때,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고정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다시,  감정이 흔들려도 다시 성경을 살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들을 붙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붙들까요?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시험 공부 앞에서 불안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주님, 제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한 것 같고, 결과가 두렵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안앞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을 찾았습니다. 말씀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 말씀이 나에게 힘이 됩니다. 불안은 내 마음을 삼키려 하지만,  예수님이, 나를 친히 돌보신다는 약속이 내 불안을 붙잡습니다.

관계에서 상처받고 마음이 무너질 때 주님앞에 고백합니다. “주님,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제 마음이 무너져 버렸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처 앞에서 주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찾아보는 것입니다. 찾아보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신뢰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사람의 사랑은 쉽게 식어버리지만,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배신한 제자조차 버리지 않으시고, 밤이 깊도록 함께하시며, 결국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헌신의 사랑에 용기를 얻습니다.

나는 상처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만, 주님의 끝까지 변치 않는 사랑이 내 무너진 마음을 감싸 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두려움이 몰려올 때 “하나님, 삶의 필요가 너무 무겁습니다.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두렵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찾아봅니다. 하나님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말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빌립보서 4장 19절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말씀을 찾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 가운데 주님이 채우신다는 메세지가 마음에 들어옵니다. 부족은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지만, 주님이 채우신다는 약속이 오늘을 버티게 하는 힘으로 경험되어집니다.  말씀이 마음과 생각을 지킵니다. 마지막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 미래가 불투명해 불안할 때 우리는 담대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길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어 두렵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미래에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말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을 발견합니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미래가 불투명해 두려움이 몰려올 때, 이 말씀을 읽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친히 주시는 평안을 내 마음에 새겨 주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말씀을 찾아서 읽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의식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작가의 한 이야기 속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두 마리의 어린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나이 든 물고기가 지나가며 묻습니다. “얘들아, 물은 어때?” 그러자 어린 물고기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말합니다.

“물? 그게 뭐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린 물고기들은 분명 물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물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늘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너무 익숙하기에 그 소리를 놓치고 삽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을 때, 그 익숙했던 은혜가 다시 의식됩니다.

그제야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하나님 안에서 내가 살고 있었구나. 그분의 음성이 지금 나를 부르고 있구나.” 그래서 흔들릴 때마다 돌아갈 기초는 내 감정이나 내 결심이 아니라, “기록되었으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깊은 흔들림 속에 어찌할지 모르는 성도들을 향하려 기록된 말씀과 더불어 한 가지 더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입니다. 복음은 단지 나 혼자 붙드는 진리로 멈추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함께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교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4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건 ‘너희를 부르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함께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세우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은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너”보다 “너희”라는 복수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시편의 기도를 보십시오. 우리를 회복하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는 고백이 많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의 임재는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공동체적 사건이었습니다. 마지막 요한계시록에서도 예배는 언제나 “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서” 함께 드려집니다.

왜 은혜로 묶으셨을까요? 신앙의 감정이 오늘과 내일이 각각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은혜가 충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여전히 무겁고 지쳐 있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고, 믿음조차 소용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차이가 공동체를 필요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충만한 이의 고백이 오늘 무너진 이의 귀에 울려 퍼질 때, 그 말씀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더 크게 들립니다 내가 혼자라면 들리지 않았을 복음의 소리가 다시 울립니다. 누군가의 간증 속에서, 함께 드리는 찬양의 가사 속에서, 목사의 설교 속에서, 내 귀가 닫혀 있을 때조차, 말씀은 다른 이의 입술을 통해 나에게 다가옵니다.

내가 은혜가 없어도, 다른 이가 은혜를 누리는 모습을 곁에서 볼 때, 그 은혜가 나에게 간접적으로 전염됩니다. 힘든 이가 회복되는 것을 보며, “나도 회복될 수 있구나” 소망을 얻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형제를 보며, 내 마음도 열립니다. 함께 웃고 함께 밥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 우정의 힘입니다. 내가 직접 체험하지 못해도,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가 체험하는 은혜가 나를 간접적으로 붙들어 줍니다. 신앙은 ‘개인 체험’만으로 지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를 부르사”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의 믿음을 붙들어 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혼자 지켜내는 싸움이 아닙니다. 복음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붙드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우리’라는 주어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드릴 때, 자신의 기도를 이웃의 기도와 묶으셨습니다. 내 신앙이 무너질 때, 이웃의 믿음이 나를 붙들고, 이웃이 약할 때, 나의 기도가 그를 세우도록 하신 은혜의 방식입니다.

결론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흔들립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이유는 복음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얼마나 충분한 분인지, 내가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흔들리는 우리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소망은 기분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사실 위에 서야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사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셨다는 사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 사실을 정말로 믿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이 끝장 났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죽음이 나를 쏘지 못하면, 다른 어떤 것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론은 새로운 비법을 더하는 게 아니라, 이미 충분한 그리스도께 더 깊이 머무는 것입니다. 바울이 새 논리나 화려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굳건히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받은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 곳은 내 감정이 아니라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이기셨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선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받아 들여진 자녀가 되었다는 곳을 마음에 믿고 여기십시오. 새로운 비법을 찾기보다, 이미 충분하신 그리스도 안에 더 깊이 머무르십시오. 오늘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에 마음을 묶으십시오.

그리고 이 복음을 붙드는 일은 혼자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함께 부르셨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이의 고백이 무너진 자를 세우고, 공동체의 기도가 나의 믿음을 붙들어 줍니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적 우정 공동체’입니다.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은 공동체입니다.

흔들림 속에서 말씀과 공동체를 통해서 더 깊이 복음으로 들어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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