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읽는 묵상
월요일입니다. 한 주가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열며 이미 계산을 시작합니다.
이 선택이 안전한지, 이 말이 관계를 흔들지 않을지, 이 고백이 손해가 되지는 않을지. 요한복음 9장도 그런 자리입니다. 맹인이 눈을 뜬 기적이 일어났지만 기쁨 대신 긴장이 흐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진리보다 입지를 먼저 생각하고, 신학적 분별보다 정치적 판단을 먼저 내립니다.
그리고 부모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압니다. 아들이 맹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말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무지가 아니라 자기 보호입니다. 이미 결의가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면 출교한다는 결정. 출교는 단순한 종교적 조치가 아니라 사회적 배제, 관계의 단절, 삶의 기반을 잃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악해서 침묵한 것이 아닙니다. 잃을 것이 두려워 침묵했습니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신앙을 낮추고, 사업 자리에서 양심을 미루고, 가족 앞에서 고백을 흐립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괜히 말해서 손해 보면 어떡하지?”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척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악하게 만들기보다 고백을 작게 만듭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대로 말합니다. “그는 선지자입니다.” 왜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그는 이미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실로암까지 걸어가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진실한 만남이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큰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월요일의 시작에서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가? 잃을 것을, 아니면 하나님을 놓치는 것을?
묵상과 성찰
예수님은 두려움 속에 숨는 사람을 바로 끌어내어 망신 주지 않으시고, 다만 그 두려움이 내 인생의 주인 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조용히 진실로 부르십니다.
나는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 진실을 ‘반쯤’만 말하고 있습니까?
새 창조의 시작은 환경이 안전해지는 순간이 아니라, “내가 너를 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더 이상 나를 꾸미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내 신앙은 지금 ‘정보’입니까, ‘경험’입니까? 나는 말씀을 “맞다”라고 동의하는 데서 멈추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말씀 때문에 실제로 한 걸음이라도 옮겨 본 적이 있습니까?
고백의 담대함은 타고난 용기가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실로암까지 걸어가 본” 사람에게 생기는 몸의 기억, 삶의 기억에서 자랍니다. 지금 나의 침묵은 지혜입니까, 두려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