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읽는 묵상
사사기 19장은 아주 불편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이 말은 단순히 정치적으로 왕이 없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던 시대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왕이 사라진 삶의 문제는 단지 예배를 덜 드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마음에서 밀려나면, 결국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내 감정이 왕이 되면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내 편안함이 왕이 되면 불편한 사람을 피합니다. 내 계획이 왕이 되면 다른 사람의 사정은 방해가 됩니다. 내 욕망이 왕이 되면 사람은 사랑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사사기의 무서움은 사람들이 갑자기 괴물이 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이 충분히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무너져 갔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관계는 이미 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사기 19장의 이야기는 그 균열이 얼마나 끔찍한 곳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죄는 언제나 거대한 악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정도는 결정해도 되겠지.” “내 기분이 중요한 것 아닌가.”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옳잖아.”
그 작은 문장 속에서 내가 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모든 결정 앞에서 “이것이 내게 좋은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선택 속에서 예수님이 정말 나의 왕이신가?”
를 묻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를 보낼 때, 가족에게 짜증이 올라올 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만날 때, 누군가의 실수가 내 계획을 망쳤다고 느낄 때, 그 순간이야말로
누가 내 삶의 왕인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에게 더 놀라운 왕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약한 사람을 희생시키신 왕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사람을 이용해 자신을 지키지만, 우리의 왕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지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십자가의 왕을 닮아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삶입니다.
오늘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하게 왕 노릇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감정입니까, 내 계획입니까, 내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기도문
주님,
입술로는 주님을 왕이라 고백하면서
제 감정과 판단을 왕처럼 붙들고 살지 않게 하소서.
사람을 제 필요에 따라 판단하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밀어내지 않게 하시고,
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을 대하게 하소서.
제 뜻이 이루어지는 하루보다
주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