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거절의 자리에 계신 예수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요한복음 12장 12-19절펼치기

12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개역개정

서 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멀리서 올라온 사람들, 명절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그를 본 적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이야기로만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지 궁금해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길가로 모였습니다. 누군가는 서 있고,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가고, 누군가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손에 들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단순한 나뭇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왜 종려나무를 흔들었을까요?

군중들의 기억에 마카베오 가문이 주도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주전 2세기 마카베오 가문의 주도로 이스라엘은 그리스 헬라제국과의 독립전쟁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시몬 마카베오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민족들이 더럽혀 놓은 성전을 정화했습니다. 그 때, 백성들이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마카베오를 환영했습니다.

그 역사를 생각하고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종려나무를 흔드는 것은 단순한 환영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로 인해 “이제 다시 나라가 회복될 것이다”라는 역사적 기대를 드러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같은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같은 방향을 향해 외칩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처럼,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때인 것처럼 예루살렘은 하나의 감정으로 묶여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대하는 얼굴이고, 어떤 사람은 흥분한 얼굴이고 어떤 사람은 확신에 찬 얼굴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로마 군대를 몰아낼 ’정치적 영웅’을 기대하며 소리칩니다. 어떤 이는 병을 고치고 떡을 배불리 먹여줄 ‘선지자’로 기대하며 환호합니다. 어떤 이는 그저 남들이 소리치니까 분위기에 휩쓸려 따라 외쳤습니다.

각자의 욕망은 다 달랐지만, 그들은 ‘호산나’라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각자가 상상하는 구원의 모습은 다 달랐지만, 그들은 ‘예수’라는 같은 대상을 향해 서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이 압도적인 환영의 축제을 기록하면서, 아주 묘하고도 뼈아픈 한 문장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16절입니다.(제가 읽겠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요한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진짜 의미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입니다.

3년을 함께 있었고, 기적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는데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교회에 오래 있으면 아는 줄 압니다. 말씀을 많이 들으면 이해한 줄 압니다.

신앙적인 언어를 말할 수 있으면 믿는 줄 압니다. 그런데 본문은 말합니다. 가까이 있었지만 몰랐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예수’를 환영했을 뿐, ‘진짜 오신 예수’를 환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환영한 것’같지만,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예수를 향하고 있지만 같은 이해는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의 환영이지만 속으로는 각자의 기대가 모여 있는 자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소름 돋는 평행선을 보여줍니다.

전환문장

저는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그 고독한 발걸음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왜 군중들과 제자들은 예수님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게 되었는지,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떠한 신학적 함의와 적용을 주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먼저, 요한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군중들과 제자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이유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호하고, 격하게 예수님을 반기는 이유는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17절, 18절입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그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유는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을 보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사건을 듣고 모였습니다.

요한은 그 열기의 중심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반응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건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능력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린다면, 내 인생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 능력이면, 우리의 현실도 변화시켜 주지 않을까” “이분이면, 이제 뭔가 달라질거야” 이렇게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낯선 반응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입니다.우리도 누군가의 간증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신묘막측하신 은혜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영혼없이 “그렇구나!! 그분이 하셨구나!!” 이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주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 하나님이면, 내 문제도 바꿔 주실꺼야”, “저 사람에게 하셨으면 나에게도 곧 하시겠지” 이런 생각이 흘러갑니다. 군중들도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사건을 듣고, 예수님을 매우 빠르게 ‘내 삶의 가능성’으로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기대와 소망 속에서 믿음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붙드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만들어 줄 “다음 장면”을 붙들고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능력을 보면, 경외하기보다 “사용 가능성”을 먼저 생각합니다. 사람은 능력 앞에서 순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누구인가보다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를들어,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이 옵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렇게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 그래, 이 사람이 우리 팀에 도움이 되겠네” 이렇게 생각이 빠르게 흘러갑니다.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정보를 들을 때 그것이 옳은가를 먼저 따지기보다 “이게 나에게 쓸모가 있는가”를 먼저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보다 유익을 따집니다. 진리보다 효과를 따집니다. 존재보다 기능을 따진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감정의 언어를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우리 다같이 13절을 읽겠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우리는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에는 3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호산나’,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이 단어들은 예수님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정확한, 성경적인 언어입니다. 요한은 시편 118편에 나오는 이 메시야의 염원을 그들이 외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장면을 통해 불편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맞는 말을 하면서도, 틀린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단어를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이 세 가지 고백을 하나씩 보면 그 마음이 어떻게 어긋나는지가 드러납니다.

먼저 “호산나”는 무슨 뜻일까요?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신앙 고백입니다. 이 단어를 단순히 “도와주세요” 정도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시편에서의 “호산나”는 막연한 외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고백하는 언약적 요청입니다. 이 고백은 이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 방법은 내가 정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가장 옳은 방식으로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것이 시편 118편의 “호산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호산나”는 겉으로는 같지만, 결이 다릅니다. 군중은 “호산나”를 외칩니다. 그런데 그 마음 안에는 이미 구원의 방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의 방식과 회복이 그들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아주 미묘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시편의 “호산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요청이지만 군중의 “호산나”는 하나님을 통해 결과를 얻으려는 요구였습니다. 시편의 호산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붙들고 드리는 기도라면, 군중의 호산나는 내가 원하는 결과를 붙들고 드리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환영은 언제든지 거절로 바뀔 준비를 합니다.

그 다음 단어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하는 군중들과 제자들은 고백은 있었지만, 이해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대로의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로 해석 된 예수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다음 표현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바로 세 번째 단어 “이스라엘 왕”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고백 역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말 왕이십니다. 그런데 이 “왕”이라는 단어를 당시 사람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왕은 적을 무너뜨리는 왕, 나라를 회복시키는 왕, 현실을 바꿔주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백 속에는 자신들의 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대감과 전혀 다른 길을 가시는 왕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너무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입술로는 주님을 나의 왕, 나의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하게 ‘내가 원하는 결과’를 쥐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닙니다. 늘 하나님을 찾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있는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내 경험과 기대라는 필터’의 해석을 통해서 볼 때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무기력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해석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해석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철저히 나를 중심으로 상황을 재구성하며 살아갑니다. 내 상처, 내 결핍, 내 기대라는 필터로 하나님을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 분을 알기 위해 먼저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상황을 어떻게 바꿔 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내가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크기’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내 기대와 하나님의 뜻이 맞아떨어질 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든 그 얄팍한 해석의 틀과 나의 그 간절한 기대가 깨지는 순간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온갖 핑계를 만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들의 환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14절과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를 거절하셨다는 증거는 ‘나귀’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신 이유를 구약성경 스가랴서와 연결했습니다. 스가랴서는 철저하게 고난 받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군중들과 제자들은 말을 탄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초라하고 평화로운 짐승인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의도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너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왕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의 기대를 모르셔서가 아니라 그 기대를 알면서도 그 방식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는 아주 묘한 긴장이 흐릅니다. 사람들은 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그들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므로, 힘과 칼이 아닌  십자가의 방식으로 통치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시작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있지만,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로 간다”는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충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거절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구원의 방식”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가 기대한 방식이 아닐 뿐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바뀌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바꾸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애굽에서는 단번에 건져내셨지만 광야는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광야를 없애지 않으시고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원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사라지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자기에게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문제를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문제를 해결하시기보다 그 문제 속에서 바울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빨리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회복도 즉각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삶을 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억울하게 팔리고 잊혀지고 감옥에 갇히는 시간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요셉을 총리로 세우기전에 그 사람을 먼저 준비시키십니다.

예수님의 걸음도 철저히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대로 향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중들은 힘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메시야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삶을 해결해 줄 왕이었지만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죄 사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절하셨습니다.

군중들과 제자들은 높아짐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더 위로 올라가고 더 인정받고 더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연약한 피조물이 되시는 낮아짐을 통해 생생명을  주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절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길은 항상 그들의 기대와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기서 복음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를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우리는 고단한 현실을 피할 ‘당장의 편안함’을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참되게 살려내는 ‘거룩함’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내 앞의 문제를 단숨에 치워줄 ‘능력’을 바라지만, 예수님은 내 존재의 밑바닥부터 새롭게 빚어내실 ‘십자가’를 주십니다.

우리는 삶의 무게를 잊게 할 ‘달콤한 위로와 성취’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피 흘리심으로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싫어합니다. 당장의 만족을 원하고 영적인 만족을 거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영적인 만족은 지금 당장 느껴지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고 오늘의 문제를 바로 바꿔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지금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지금 마음이 편해지는 것, 지금 문제가 풀리는 것, 지금 상황이 나아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더 현실입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게 무엇일까요? 나를 바꾸지 마세요!! 상황만 바꿔주세요!! 이것이 우리의 마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편안함을 주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성공을 쥐여주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십자가가 불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지금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죽이고 새롭게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치는 그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변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드러남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같았습니다. 처음에 외쳤던 “호산나”도 나중에 외쳤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도 같은 자리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어떤 자리입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는 자리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이미 이런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말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외침은 완전히 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배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앙의 민낯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결 론

예수님은 이 환호가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곧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종려나무를 흔드는 그들의 손이 곧 자신을 밀어낼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서지 않으셨습니다.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들어가셨습니다. 나귀를 타십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셨던 것 처럼 그들은 돌변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쳤던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외쳤던 그들이 이제 당신이 왕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사기꾼 처럼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라고 외쳤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께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요구와 조롱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그들의 요구에 거절하셨습니다. 조목조목 설명하지 않고 침묵으로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못 내려오신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자리를 내려오시면 자신의 고통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거절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거절은 그들를 외면한 거절이 아니라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 거절이었습니다.

이 거절앞에 우리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지금 이 상황만 좀 바꿔 주시면 안 됩니까" “기도했는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버텨야 합니까”, “조끔만 덜 힘들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 지금 좀 바꿔주세요!! 지금 좀 내려와서 고쳐 주세요!! 간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가 원했던 방식으로 상황을 단번에 바꿔 주지 않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선물만 구하다가 정작 ‘하나님의 얼굴’을 놓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장의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보다, 이 막막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자아가 깎이고 빚어지는 것이 우리의 영혼에 더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내 손에 쥐어지는 응답보다, 고난의 밑바닥에서 나와 함께 우시는 ‘예수님 자신’을 더 깊이 만나게 하려는 그분의 애타는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거절은 거절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마주하게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해서 따라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오해한 채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사랑해서라기보다 필요해서 붙든 순간이 더 많았고 확신해서라기보다 흔들리면서 따라온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역설적으로 언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까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거절될 때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들어주셔야 사랑입니다. 응답하셔야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어주지 않으시는 자리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자리에 십자가를 내미십니다. 십자가가 사랑이며,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요즘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도 지쳐있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상황은 그대로이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기도와 응답사이가 막연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래서,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에서의 거절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거절은 기도를 멈추라는 신호가 아닙니다.

이미 가장 깊은 방식으로 당신을 붙들고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부르심입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가장 깊이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걱정하며 물러설 때가 아닙니다. 응답보다 더 확실한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을 의지하며 다시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는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엇을 더 받을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를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려내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거절이 끝이 아니라 거절이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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