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창세기 5장을 읽다 보면 이름이 이어지고, 나이가 나오고, “몇 살에 낳고, 몇 년을 살고, 죽었더라”가 반복됩니다. 이 건조하고 딱딱한 문장들을 읽다 보면, 솔직히 우리의 마음은 갈 길을 잃습니다. 처음에는 ‘성경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집중하다가, 어느새 마음은 다음 장으로 넘기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900살이라니…? 이것이 정말 역사적인 기록일까, 아니면 아주 오래된 신화일까, 전설일까?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이 숫자들 앞에서, 우리는 일종의 ‘거리감’을 느낍니다.
성경을 오랫동안 사랑해 온 분들조차 이 창세기 5장 앞에서는 말 못 할 난감함을 느끼곤 합니다.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이런 질문이 고개를 듭니다. 이 거대한 족보가, 오늘 치열하게 살아가는 내 삶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죽었더라”의 반복되는 선언 속에 과연 내가 붙들어야 할 메시지가 있기는 한 것일까?
여러분도 오늘 본문말씀을 교독할 때에 같은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결코 의미 없이 반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반복 속에, 우리가 피하고 싶은 한 문장을 계속 들려줍니다. “죽었더라.” 900년을 살든, 700년을 살든, 누구도 이 문장을 피해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장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로 들어온 죽음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마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족보는 창세기 4장의 흐름과 이어집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삶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을 떠난 가인은 성을 쌓습니다. 그 성은 발전의 상징이기 이전에, 두려움의 산물이었습니다. “혹시 누가 나를 해치면 어떡하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인간은 결국 혼자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막막함 속에서 무언가를 쌓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돈, 성과, 스펙, 인정, 자리, 관계, 영향력… 우리는 그것을 ‘자기계발’과 ‘미래 준비’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더 정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나를 지키려는 마음이 쌓는 성, ‘가인의 성’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가인의 성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속은 불안합니다.
“혹시 무너지면 어떡하지?”언제나 의심이 함께 합니다. 그래서 더 높이, 더 두껍게, 더 많이 쌓습니다. 문제는 노력 그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나를 지켜 줄 것처럼 느끼는마음입니다. 은혜가 아니라 내가 쌓은 것들이 나의 안전이 될 때, 우리는 가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같은 죽음의 반복 속에서 반복되지 않는 한 문장이 튀어나옵니다. 성경은 눈여겨 보라고,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듯 이렇게 기록합니다. 21절이하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여기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가인의 성을 쌓는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유한한 삶을 살아가지만, 모두가 똑같은 방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에 두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을 혼자 지키려는 길과,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현실에서 어떤 선택으로 드러날까요? 오늘본문을 통해서, 동행의 의미가 무엇인지,우리는 어떻게 동행을 이해해야 하는지 에녹의 이야기를 통해서 동행의 의미를 세 가지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첫 번째로, 에녹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하나님과의 동행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성경은 먼저 우리에게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의 기록을 볼 때, 단순히 생물학적인 나이나 숫자에만 매몰되면 성경이 진짜 말하려는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의학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 숫자를 기록한 이유는,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녹의 동행을 주목해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는 것은 에녹이 65세부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65세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동행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겨납니다. 에녹이 65세부터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하나님은 언제부터 에녹과 동행하셨는지 궁금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이 64세될 때까지는 그를 모른 척하시다가, 65세가 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자, 오늘부터 1일이다, 손잡자!"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이 65세에 삶의 방향과 시선이 주님께로 향하기 훨씬 전부터, 에녹이 태어난 순간부터, 아니,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그와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애녹이 ‘65세부터 동행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때 갑자기 찾아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점부터 에녹의 삶을 규정하는 중심이 분명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바뀐 것이 아니라, 에녹의 삶의 방향과 시선이 하나님께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65세 이전의 에녹은, 어쩌면 우리와 똑같았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고, 내 열심으로 성과를 내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왔지!"라고 자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65세가 되던 해, 므두셀라를 낳으며 그의 인생을 뒤흔드는 어떤 사건, 혹은 깊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아, 내 인생이 나의 혼자의 힘으로 온 게 아니었구나. 내가 모르던 그 순간에도, 내가 교만했던 그 시간에도, 하나님은 한 번도 내 곁을 떠나지 않으셨구나. 그분이 나를 붙들고 계셨구나.” 이런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행'은 내가 새로운 결심을 해서 하나님 손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동행은 이미 나를 잡고 계셨던 하나님의 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이룬 성취, 내가 누린 안전, 나의 가정, 나의 경력, 이 모든 것이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동행' 덕분이었음을 뼈저리게 인정하는 그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 진짜 동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이 깨달음은 꼭 인생의 큰 위기나 실패 앞에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우리 마음을 두드리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끔 퇴근길 버스에서 창밖을 보다가, 문득 지난날을 돌아볼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회상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치열하게 노력해서 이룬 성취라고 생각했고, 내가 땀 흘려 지켜온 가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모든 과정 사이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빈틈'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 일이 어떻게 그렇게 잘 풀렸지?" "그때 내가 정말 위험한 선택을 할 뻔했는데, 누가 나를 막아준 거지?"
"내 실력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지금 내가 여기 서 있는 거지?" 나의 노력과 계획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순간을 반드시 마주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내가 갑자기 겸손해져서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닫혀 있던 우리의 눈을 조용히 열어주시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동행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진짜 동행은 '발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녹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동행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나오는 에녹의 족보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기록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부터 하나님과 긴밀한 동행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성경은 에녹의 아들의 이름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므두셀라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아들의 이름은 아버지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조용히 드러내는 창과 같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아버지 에녹의 삶의 방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라는 이름과 에녹의 동행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이 이름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는 오래된 논의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형태를 분석하는 일부 학자들은 이 이름을 ‘창을 던지는 자’, ‘무기를 든 용사’와 같은 이미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마을을 지키는 강력한 전사를 떠올리게 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유대 전승과 다수의 보수적 성경학자들, 그리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함께 읽는 해석자들은 이 이름 속에 더 무거운 예언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그가 죽으면, 그것이 보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아이의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해석이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성경의 연대기적 흐름과 정확히 맞물린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을 보십시오.) 에녹은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다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맥을 낳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일어납니다.
므두셀라의 나이 187세와 그의 아들 라멕의 나이 182세를 합치면, 369세입니다. 그때까지, 므두셀라는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라멕의 아들인 노아가 600세가 되던 해에 우리가 잘 아는 노아의 홍수가 일어납니다. 창세기 7장 5절에서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그리고 노아가 600세가 되던 해에, 므두셀라의 나이가 969세가 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므두셀라가 눈을 감던 바로 그 해에, 하나님이 예고하신 홍수 심판이 이 땅에 임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러한 맥락을 족보안에 심판과 시간감각을 넣어 놓은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969세에 므두셀라가 죽은 후에 홍수의 심판이 왔고, 이 계산이 므두살라의 이름의 뜻과 연결하여, 히브리어 ‘무트’ 라는 죽다라는 뜻과, ‘샬라흐’라는 보내다 라는 뜻의 합성어로 해석하여 언어학적 근거보다도, 홍수연대와 맞불려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를 지지하고 있는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구약성경을 읽던, 신약시대의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유다서 1장에 보면, 에녹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놀라운 것은, 신약 성경이 에녹을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동행한 사람’이기 전에, ‘심판을 예언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 속에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았을 65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때부터, 에녹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에녹은 언제 심판이 올지는 몰랐습니다. 때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결산의 시간이 온다는 하나님의 메세지는 그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태도와 자세는 다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억했고, '다가올 마지막'을 상기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을 함부로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우리 성은 영원할 거야, 내 업적은 영원할 거야"라고 착각하며 욕망에 취해 살 때, 에녹은 '끝'을 아는 자의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녹이 보여준 동행의 두 번째, 하나님앞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에녹의 동행은 우리가 이해하는 동행을 점검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루 24시간 내내 성경책만 펴놓고 있거나 산속에 들어가 기도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끝이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 내 앞에 주어진 삶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내는 태도입니다. 직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적당히 요령 피우고, 부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동행하는 사람은 멈춥니다. CCTV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이 폭발해서 험한 말을 쏟아내고 싶을 때, 그 순간 멈칫하게 됩니다. "이 사람도, 내 감정도 영원하지 않다. 하나님이 지금 이 식탁에 함께 앉아 계신다." 그 인식이 우리를 죄로부터 지켜줍니다.
에녹은 우리에게 "끝을 기억하라. 그래야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녹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동행이란,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이 동행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녹의 동행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11장 5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자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녹이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6절에서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즉,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이유는 그의 도덕적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 곧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던 삶의 방향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실수하지 않는 능력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넘어지지 않는 힘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을 찾는 방향성이고, 실수했을 때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태도이며, 반복해서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자세입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의식입니다. 에녹의 동행은 “나는 늘 하나님과 잘 지냈다”는 자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고백에 가깝습니다. “나는 연약하다. 그래서 나는 혼자 살 수 없다. 오늘도 하나님의 손을 놓치지 않겠다.” 그래서 에녹은 자기 확신으로 살지 않았고, 자기 의로 버티지 않았고, 자기 성을 쌓으며 안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했고, 하나님의 시선을 기억했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동행의 본질입니다. 동행은 하나님을 늘 만족시키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늘 의식하는 삶입니다. 동행은 죄가 전혀 없는 삶이 아니라, 죄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삶입니다.
동행은 대단한 종교적 결심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선택 속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에녹의 족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동행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보면, 유일하게 “죽었더라”라는 말이 없는 사람이 에녹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에녹의 삶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900세였다면, 365세에 떠난 에녹은 남들의 인생의 3분의 1밖에 살지 못한 셈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안타깝고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주님과 동행하다가 갑작스러운 병이나 사고로, 혹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 곁을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질문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입니까? 하나님과 평생 동행한 대가가 고작 이것입니까? 왜 저 악한 사람들은 저렇게 장수하며 잘 사는데, 왜 이 신실한 사람은 이렇게 빨리 데려가십니까?”
아마 우리 모두 이런 안타까운 질문을 가슴에 품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아픔을 가진 우리들에게,성경은 아주 특별한 단어 하나를 주목하게 합니다. 성경은 에녹에게 “죽었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말합니다. 여기 사용된 “데려가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카흐’입니다.
이 단어는 죄인을 체포하듯 “끌어가다”라는 차가운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를 맞이하여 데려갈 때, 아버지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자녀를 번쩍 안아 올릴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에녹을 어떻게 보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남들보다 일찍 데려가신 것은 그 어떤 형벌도, 비극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짧게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와 뜻이 있어서 “먼저 부르셨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해 줍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아니라 “데려가셨다”는 표현은, 우리 인생의 가치가 시간의 길이에 있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에녹과 그의 아들 므두셀라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족보에서 에녹의 삶은 가장 짧았지만, 그의 아들 므두셀라의 삶은 가장 길었습니다. 이것이 참 신기합니다. 아버지는 매우 이른 죽음으로, 아들은 매우 늦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에녹도, 므두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에녹에게는 ‘떠남의 은혜’가 있었다면, 므두셀라에게는 ‘머무름의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입니다. 므두셀라가 오래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그만큼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다는 증거입니다. 먼저 떠난 자에게는 안식이라는 은혜를 주시고, 남겨진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할 몫이 있기에 생명을 연장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간 성도를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도, 남겨진 나를 보며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의 시간표가 다를 뿐,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합니다.
남들보다 오래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일 수 있고,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하나님의 품으로 데려가심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길든, 짧든, 내가 원하는 때에 끝나든, 원치 않는 때에 끝나든, 나의 ‘마지막 시간’을 결정할 권한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동행’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행이란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시계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나의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고, 하나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몸소 받아들이는 것이 동행입니다. 그래서 우리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수명의 길고 짧음보다, 오늘 내가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매일, 매일 내가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은 나의 뜻에 주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주님의 시간이 다름을 믿고,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며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결 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녹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확인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나를 붙잡고 계셨다는 사실에 눈이 열리는 것이 동행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막연한 신앙 감정이 아니라, 끝이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태도입니다. 내 인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오늘의 말과 선택과 침묵이 하나님 앞에서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시계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나의 때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시간과 섭리를 신뢰하며 걷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동행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할까요?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정말 원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심을 구속으로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앞에서 가볍지 않다는 것에 두렵지 않으세요? 나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다르다는 것이 통제로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정말 내 인생의 시계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동행을 정말로 원하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동행의 삶이 아닌, 가인의 성을 쌓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현실은 하나님을 믿고 동행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믿고 나아가면, 너무나 불확실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상황을 보십시오. 권력이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현실을 봅니다. 강대국의 이해 속에서 삶의 터전이 위협받는 땅들을 봅니다. 점점 더 벌어지는 부의 격차와 열심히 살아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을 느낍니다.
기술은 발전하지만 사람의 존엄은 더 쉽게 소모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다 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럴수록 내가 더 강해져야지.”, “이럴수록 내가 나를 지켜야지.” “이럴수록 내 성을 더 높이 쌓아야지.” 이런 우리의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에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인의 성을 쌓고 있는 우리들, 하나님과 동행하기 싫어하는 우리의 내면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의 삶을 통해서 폭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본문은 에녹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을 꺼려하는 우리들에게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너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 나와 동행하기를 꺼려하는 너의 마음은 지금 어디 있느냐, 물어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이런 불신과 의심, 자기 성을 쌓고 있는 우리의 내면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동행을 원하지 않아도,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고 계실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기 싫어하는 우리의 내면의 완악함을 아시면서도 주님은 왜 우리를 꼭 붙들고 계실까요? 무엇 때문에, 동행하길 원한다고 거짓말로 둘러내는 우리의 고백을 아시면서도 주님은 왜 우리를 포기하지 못하실까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해,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혼자’ 남겨두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너희가 나에게 오면 동행하겠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동행을 조건으로 내거신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로 가겠다. 내가 너희와 함께 걷겠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로 가겠다.는 사실을 보여준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완전하게 동행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그 완전한 동행이 끊어지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절규는 우리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기위해 치르신 대가였습니다. 우리가 동행을 포기해도, 하나님은 동행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혼자’ 두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우리가 완성하는 관계게 아니라,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관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패해도 무너져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들려도 주저앉아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내 옆에 언제나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져서 하나님 없으면 안된다고 느낄 때, 여전히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인입니다. 우리가 애통해 하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돌이키는 마음이 들 때, 여전히 주님이 우리를 용납하고 계시다는 메세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벽처럼 느껴지는 큰 문제와 상황과 현실앞에서 우리의 내면에 힘을 주시며,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은 여전히 주님이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잘 해내는 삶이 아닙니다. 넘어지지 않는 삶도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내 인생의 시계를 주님께 다시 맡기며, 다시 일어서며, 다시 돌아오는 것이 동행입니다. 이제 말씀을 삶으로 가져가며, 한 가지만 붙들고 싶습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서 주님과 동행하는 가장 현실적인 한 걸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잘해 보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하루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불안을 맡기고, 계획을 맡기고, 두려움을 맡기십시오. “주님, 오늘도 저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이 짧은 고백이면 충분합니다.
이 고백속에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동행하는 것을 힘들게 하는 세상의 소리와 모순과 문제앞에서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이 길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교회는 동행을 함께 배우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아픔 앞에서도 분노와 체념으로 끝나지 않고, 동행하시는 주님께 다시 가져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동행하고, 기도를 통해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동체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이 땅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 억눌린 자들의 숨을 붙들어 주십시오.” “주님, 우리를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마음이 아픈 곳에 우리의 마음도 머물게 하소서.” 간구하면서 주님과 함께 아파하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고, 주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은혜이음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