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한계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지열은혜이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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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읽는 묵상

니고데모는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많이 아는 사람이었고,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이미 충분히 도달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답해 주는 위치에 있었고, 삶의 구조와 질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질문은 공손했고, 말은 정중했으며, 논리는 정확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전혀 다른 말을 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개념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해의 능력이 아니라, 이해가 서 있는 출발점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설명하려는 자리에 있었고, 예수님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숫자와 흐름으로 삶을 읽습니다. 직장인은 성과와 평가로 자신을 설명합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은 스펙과 가능성으로 미래를 계산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경험과 책임으로 하루를 버텨냅니다.

우리는 모두 이해하며 살아야 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정확히 알고 싶고, 더 안전하게 판단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이 방식이 너무 오래 반복되다 보면 하나님조차 이해의 대상으로만 남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막힌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설명 가능한 선생으로 보았고, 예수님은 자신을 존재를 새로 여시는 분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너희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이 말은 이해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통제하려는 이해를 내려놓으라는 초대입니다. 거듭남은 더 나은 설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붙들고 있던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밤에 이해하지 못한 채 돌아갑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후반부에서 그는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통과해 오시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의 이해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생명을 놓으십니다.

묵상과 질문 3가지

예수님은 내 질문에 답을 보태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자리 자체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답을 주시는 분으로만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내 삶의 구조와 기준은 그대로 둔 채 “조금 더 설명해 달라”고만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내 신앙은 변화된 생명입니까, 아니면 정리된 생각입니까?

거듭남은 삶을 조금 더 잘 살게 되는 변화가 아니라, 내가 의지하던 출발선을 내려놓고 다른 시작점에 서는 일입니다.

나는 신앙을 통해 무엇을 유지하고 싶어 합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끝까지 내려놓지 않으려는 ‘출발점’은 무엇입니까?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을 가장 듣기 싫은 영역은 내 삶의 어느 부분입니까? (돈, 관계, 자녀, 미래, 인정, 안전…)

십자가는 이해한 뒤 받아들이는 진리가 아니라, 이해되지 않아도 몸을 맡기며 들어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나는 여전히 십자가를 “설명되어야 믿을 수 있는 사건”으로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설명되지 않아도 순종했던 순간, 이해되지 않아도 맡겼던 경험이 내 삶에 실제로 있었습니까?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쳐다보라, 맡기라”고 하시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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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열은혜이음교회

은혜이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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