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읽는 묵상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평생 상처 속에 머물고, 어떤 사람은 그 상처를 통해 더 깊고 넓은 사람이 됩니다. 차이는 사건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상처를 중심에 두고 인생을 해석하면 마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피해자다.” “저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쳤다.” “그 일만 없었어도 내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 해석은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고, 어떤 사건은 우리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문제는 상처 자체보다, 그 상처가 내 인생의 최종 해석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때부터 과거는 기억이 아니라 감옥이 됩니다. 상처는 사건이 아니라 정체성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르게 이렇게 살아갑니다. “내 삶은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믿음은 상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이 일조차 사용하실 수 있다.” “이 상처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다.” “사람은 문을 닫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길을 여신다.”
요셉의 삶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팔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거짓으로 고발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요셉의 인생은 배신, 누명, 망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요셉은 과거를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죄를 없던 일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형들의 행동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손을 보았습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그 일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처가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이 되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나를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밀려난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사람은 나를 낮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낮아진 자리에서 나를 깊게 빚으셨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합니다. 문이 빨리 열리기를 원하고,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하며, 기도의 응답이 즉시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과보다 사람을 먼저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감옥은 요셉을 가두었지만, 하나님은 그 감옥 안에서 요셉의 내면을 확장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저 사람 때문에”라고 말하고 있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일조차 선하게 사용하고 계심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